키르케

작가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키르케를 투영하며 이렇게 말한다. “키르케 역시 고향을 동경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와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기다리는 고향 이타케 같은 곳이 없다. 키르케는 그런 고향을 발견해야만 하고, 직접 개척해야 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자기에게 적대적인 세계에 반항하면서까지.”


🔖 키르케, 그가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신탁이나 예언이 아니다. 어린애한테 함직한 얘기다. 그가 악몽을 꾼 아이를 안고 흔들며 다시 재울 때, 베인 상처를 소독할 때, 뭔가에 쏘인 곳을 진정시킬 때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어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이 내 살결만큼 익숙하다. 밤공기 위로 따뜻하게 번지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무섭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파도 속에서 헤엄친다는 게, 흙을 밟고 걸으며 그 느낌을 감상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 뜻이다.

하늘에서 별자리가 어둑어둑해지고 자리를 바꾼다. 바닷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