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프롤로그 중
‘사악한 기운이 조앤을 죽였어. 이유가 되려고.’
(…) 나는 내가 작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조앤의 죽음 덕분이라는 소름 끼치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그 결론을 더 깊이 생각하면, 그 사건이 내 글쓰기의 동기가 되고 내 글쓰기를 발전시켜 왔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나를 사로잡은 유령의 끝없는 위협과 함께 살고 있으며, 그 사로잡힘에서, 조종에서 벗어날 끝없는 필요와 함께 살고 있다. 조앤의 죽음이 나를 침략자, ‘사악한 기운’과 만나도록 이끌었으며, 나를 평생토록 발버둥치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나의 여정을 적어서 내보이는 것 말고 달리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다.
리는 너무나도 피곤하고 우울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무어에게는 결핵도, 신장병도, 파상열도 없었다. 무어가 앓는 것은 죽음이라는 병이었다. 무어의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죽음이 깃들었다. 희미하고 푸르스름한 부패의 기운. 리는 무어가 어둠 속에서도 빛나리라 상상했다.
어두운 극장에서 리는 자기 몸이 앨러턴을 향해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몸에 들어가고 싶은, 그의 폐로 숨을 쉬고,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내장과 생식기의 느낌을 익히고 싶은, 맹목적인 벌레같은 허기로 팽팽해진, 아메바 같은 원형질의 투사(投射). 앨러턴이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리는 날카롭게 쑤시는 아픔을, 영혼이 삐거나 탈골된 기분을 느꼈다.
불쌍한 보보, 정말 끔찍한 종말을 맞았어. 방트르 백작의 히스파노스위자를 타고 가다가 탈장된 장이 아래로 흘러 내려서 차 밖으로 날리더니 뒷바퀴에 감겼지. 내장이 완전히 빠졌어. 빈 껍질만 남아서 기린 가죽 시트에 그대로 앉아 있었어. 눈이랑 뇌도 쉭 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갔어. 방트르 백작은 그 무시무시한 쉭 소리를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말하지…….
그런 뒤에 나는 외로움의 의미를 깨닫게 됐어. 하지만 보보의 말이 달그락거리는 발음으로 무덤에서 나를 찾아왔지. ‘정말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일부야.’ 다른 사람을 보고 ‘너는 나의 일부’라고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 젠장 어쩌라는 거지? 우리 모두가 무엇의 일부라면 함께 작동할밖에. 그렇지?
앨러턴이 적대감이나 혐오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는 앨러턴의 눈에서 기묘한 초연함을, 동물이나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냉정한 평정을 보았다.
“생선 맞네. 차갑고, 미끌거리고, 잡기 어려운 생선.”
에필로그: 멕시코시티로 돌아오다
아트와 나는 ‘어디는 어떤가, 그렇고 그렇다.’는 뻔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멕시코시티는 시공간 여행의 터미널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한 잔 할 수 있는 대합실이다. 그래서 나는 멕시코시티나 뉴욕에서는 머물러 있어도 견딜 수 있다. 머무른다고 해도 발이 묶이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행을 하는 길목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교차로인 파나마에서는 사람이 노화하는 세포 덩어리에 가까워진다. 팬암이나 더치라인과 타협하여 육신을 그곳에서 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은 거기 머물러 함석지붕 아래 후덥지근한 열기에 썩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마침내 앨러턴을 찾는 꿈을 꾸었다.
“우리가 어떤 협약을 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