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콜링
🔖 루즈벨트 아일랜드
빛 속에서 그늘을 들쳐 업고 너와
섬에서
물담배 피우고 싶다. 글라스로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럼 넌 내 눈을 보고 그림 이야기를 하겠지. 여러 개의 시선이 뒤섞인 세잔에 대해서. 세잔을 말할 때 반짝이던 네 눈에 대해서, 쓰겠지. 좁은 캔버스에 갇힌 검은 침대와 컵과 흰 장미를. 한 쌍의 브래지어를 우리에게 채우는 나라에 대해서. 그럼 우린 왜 이 순간이 위대한지 말하겠지. 우린 섬에서 또 다른 섬에 가 눕겠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네 방에 앉아서 맨해튼을 바라보겠지. 내일은 그랜드 센트럴에 가서 우리 주니어스 치즈 케이크를 먹자. 먹으면서 왕가위 영화를 보자. 이랑의 노래를 듣자. 들키지 말자. 그리고 우리 참 지질하다고 웃겠지. 목에 커튼을 걸고 거울 앞에 서서 우린 잘 어울린다고 말하겠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째서 사랑이 아니야?
웃겠지
내가 돌아가는 그 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다고 네가 그랬다. 뉴욕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그랬다 네가.
🔖 ... 이 글이 써내려갈 읽기의 기록이 어떠한 시대적 규범 하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의식화하기 위해서다. 사실 '읽기'란 두려운 것이다. 시사키 아타루가 '읽기'와 '혁명'의 관계를 논의하며 가장 먼저 강조했던 것이 읽기란 본래 무의식적 접속이기에 읽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겪어 내야 하는 일이고, 타인의 꿈을 대신 꾼다는 것은 읽는 자의 실존을 뒤흔들 만큼 위협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읽기'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마침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후의 고독'이라고 비유했던 것을 인용하며, "그 싸움에서 우리는 하얀 종이의 표면에 비치는 광기와 그것을 읽지 않겠다고 하는 자신의 방어 기제에 동시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차례로 넘기는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무의식의 벌거벗은 형태로 도박을 하는 것"이라 정의 내릴 때, '읽을 수 없는 것'이란 사실 '읽고 싶지 않은 것'에 다름 아니다.
*영감을 준 현대 미술의 여성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쉬린 네샤트, 니키 드생팔, 실비아 슬레이, 트레이시 에민, 루이스 부르주아
*사라진 사람과 사라지지 않은 __ 혹은 그 반대
💬 여성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뭘 쓰고 싶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