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시대
🔖 개인이 각자의 정신이 미치지 않도록 기울이는 노력의 형태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글만 쓰면 안 된다고, 새로운 경험이 글의 밑천이 될 거라는 말은 반만 맞다. 글쓰기는 도자기 빚기와 같다. 도자기를 빚을 때, 물레는 계속 비슷하게 돈다. 도는 행위는 유지되지만, 미묘한 손길에 변화를 줌으로써 도자기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빚어진다. 그러므로 도자기를 빚는 인간에게 왜 자꾸 도냐고, 왜 자꾸 똑같은 동작만 반복하냐고, 그만 돌고 새로운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 사람은 거대한 반복 안에서 자신만의 내밀하고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는 주문이나 새로운 것을 향해 뛰어들라는 유혹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내면에서 발생시키는 실질적인 새로움을 보지 못하는지도.
🔖 <언어가 정형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시적일 수 있듯이, 삶에서 본질적인 형식이 부정되더라도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있다.> 이 문장을 뒤집어서 다시 읽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삶에서 본질적인 형식이 부정되더라도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있듯, 언어가 정형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시적일 수 있다.>
🔖 <나의 동일시는 불완전한 것이다. (...) 왜냐하면 내가 '진지하게' 그 사람의 불행에 동일시하는 순간, 내가 그 불행에서 읽는 것은 그것이 나 없이 일어났으며, 이렇듯 스스로 불행해진 그가 나를 버리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와는 무관한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그건 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나 다름없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방의 괴로움에 완전히 동참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어떤 불행으로 괴로워할 때 나는 소외되기 대문이다. 하기사, 내가 상대방의 고통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연애를 시작하고 14일하고 세 시간 이십칠 분까지만 가능하지 않은가. 이 믿음이 깨지는 것에서 첫 번째 관계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고통과 희망의 원천은 한때 나였으나, 이제는 상대는 내가 아닌 다른 고통과 행복에도 눈을 돌린다. 관계의 발전은 다른 고통에게 나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상대가 내가 아닌 이유로 행복해하고 내가 아닌 이유로 절망하는 모습을 받아들이며 시작된다.
🔖 그런 식으로 계속 걸었다. 가다가 오르막길이 나오면 되돌아갔다. 다시 계단이 나타나면 물러났다. 비가 오면 피했다. 물러나기와 항복하기, 싸우지 않기, 견디지 않기를 했다. 항복하기, 항복하기, 항복하기 연습, 항복을 즐기기. 항복도 계속하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왠지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무조건 평지만 걸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면 발을 빼는 거야. 왜냐하면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않는 순간, 배움이 없는 순간, 성취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 버리는 시간, 그런 시간들을 용서하고 삶에 초대한 것으로, 일명 ‘시간 갖다 버리기’, ‘시간을 쓰레기로 만들고 기뻐하기’, ‘그 쓰레기를 재활용하지 않기’, ‘삶을 일정 부분을 낭비하기’이니까.
『G.H.에 따른 수난』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침내 실망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전의 나는 나에게 이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롭지 못함으로부터 나는 최고의 것을 거두었다. 그것은 희망이다. 스스로의 불행으로부터 미래를 위한 덕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지금 두려움은, 내 새로운 존재방식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가?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매번 일어나는 일에 나를 맡겨 두면 왜 안 되는가? 나는 우연이라는 성스러운 위험을 감수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운명을 개연성으로 대체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