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들

🔖  딸은 그런 어머니를 보면 허기와 추구의 세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완전히 압도적인 전투”로 보인다고 말한다. 통신사 칼럼니스트인 엘런 굿먼은 이런 현상을 다룬 글에서 새로 등장한 10대와 20대 여성들이 자기네 어머니들에게서 “스트레스로 나가떨어진 때로는 번아웃된 여성운동의 최전선”을 보고, 넌더리가 난다는 듯 “그런 게 모든 걸 다 가지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되뇌며 돌아선다고 썼다. 나의 젊은 친구도 그 정서에 공감하면서 주장을 더욱 확장한다. 어머니의 높은 성취욕이 진을 빼는 일일 뿐 아니라 위협적이라고도 느끼며, 자신이 그런 어머니의 기준에 도저히 부합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를 보면 그것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 게 모든 걸 다 가지는 거라면, 나는 차라리 낮잠이나 자겠어요.”

🔖  선택지들이 폭발적으로 열어젖혀진 세계에 이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유산이 전해졌으니 모든 예스는 과거의 노와 충돌할 소지가 다분했고 여기엔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따른다. 욕구의 밑바닥에 깔린 질문들도 어마어마하다. 무엇이면 만족하겠는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도대체 어느 만큼이고, 무엇인가? 진정한 열정은, 아름다움 혹은 날씬함이라는 외적 목표 뒤에 감춰진 진짜 허기는 무엇인가?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탐색해보라는 권고를 받은 적이 없었거나, 적어도 깊이 있고 일치되는 견해에 따라 사회가 지지하는 방식으로 권고받은 적은 없었다. 우리는 한 세대에 걸쳐 열어젖혀진 문들과 기존 사회구조의 몰락이 자극하고 장려한, 이른바 포스트 페미니즘적 욕구를 품게 되었지만, 이런 욕구를 갖는 일에 대해 항상 명백하고 확고한 지지나 허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욕구에 늘 따라붙던 경각심과 경고가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니며, 욕구를 지지해줄 심층적 권리 의식도 아직 갖지 못했다.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다. 이걸 짚고 넣어가는 게 중요하다.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여자들이 한 세대 전보다 더욱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제약이 훨씬 적고 훨씬 더 자립적이며 정치적으로 훨씬 더 강력해졌다.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은 있다. (...) 그러나 여자들의 압도적 다수 —80~89퍼센트로 추정된다 — 가 매일 아침 자기혐오의 불안한 동요를 의식며 잠에서 깨고, 스타킹을 끌어올릴 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바지와 스커트의 지퍼를 올릴 때 배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착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여자들이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비율은 남자들의 세 배다. 여성의 80퍼센트가 다이어트를 한 경험이 있고 어느 순간에나 여성의 절반이 적극적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며 자기 몸이 늘 불만스럽다고 답한 이들이 절반이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문화가 매개한 현상이라는 것, (그 자체로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 외모대한 여성의 몰두에 특유의 형태를 부여하고 유독 날씬함에 가차 없이 집중하는 성격을 띠게 만든 것이 문화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외모 전반에 대한, 특히 체중에 대한 불안의 전례 없는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그 엄청난 수치는 시각적 표상보다 더욱 복잡한 무엇이 작동하고 있음을, 권력과 유능함과 힘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의식이 아직 본능적 확신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권리와 자격이 본능적이고 영속적이며 실질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려면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해야 하고, 더 폭넓은 차원에서 알려지고 인정되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들은 여전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난 40년 동안 이뤄낸 그 모든 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저 바깥세상을 거의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는 여전히 남자들이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 최상위 기업 경영진의 98퍼센트가 남자다. 오늘날 벤처 창업 투자금의 95퍼센트가 남자들의 은행 계좌로 홀러들어간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받는 최고경영자 200명은 전부 남자다. (...) 나는 이 격차, 즉 한쪽에 있는 개인적 자유와 다른 쪽에 있는 정치적 힘 사이의 이 끈질긴 불균형이 욕망 뒤에 자리한 불안이라는 요인을 증폭시킨다고 생각한다. 이 격차는 여자들에게 뭔가 계산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남기고, 선택들이 편파적이며 단서들을 잔뜩 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오늘날 여자는 신경외과 의사도 될 수 있고 천체물리학자도 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따라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으며, 배우자와 헤어지고 짐을 꾸려 대륙의 반대쪽 끝으로 이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들에서 한 걸음 더, 아니 두 걸음 더, 아니 열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을까? 단순히 천체물리학자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음식과 섹스와 쾌락과 찬사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완전한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강력하고 활기 넘치는 거물급 천체물리학자일 수 있을까? 나라의 반대쪽 끌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와 함께 여자란 원래 어떻게 보여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관한 뿌리 깊은 모든 감정을 떨쳐내고 떠날 수 있을까? (...) 이런 충돌은 오늘날 욕구가 유독 큰 문제로 대두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욕구들은 가능성과 제약, 힘과 무력함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밀고 당겨지는 대단히 모호한 맥락 속에,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새로운 비전은 분명히 만들어진다. 비록 그 비전이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무엇이 효과 있고 무엇이 적합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의하는 일에서, 즉 개인적 정치에서는 분명 변화를 일으킨다. 어느 교회 지하실에 모여 허기와 포만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던 한 무리의 여자들, 굶기를 재정의한 패션 모델, 상담실에 앉아 감각성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닦아가는 심리 치료사와 내담자. 홀로 강물 위에서 스컬을 하며 강함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한 사람. 공적인 전쟁터들이 오늘날에는 사적인 전쟁터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두 전투에 적용되는 역학은 대체로 동일하다. 무엇이든 당신을 몸과, 자신과, 다른 여자들과 연결하는 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빈 곳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