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텍사스의 학자들은 단호하게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그로칼랭을 볼 때면 저런 것이 존재 가능하다는 생각만 해도 무지와 이해 부족이 덮쳐와 그로칼랭이 가능성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다른 것, 다른 누구에 대한 가능성을 예감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이다.

희망을 품지 않으면 확실히 죽도록 무서울 일도 없다. 희망과 공포는 늘 붙어 다닌다.


🔖 그래서 난 그 사람 뒷통수에 대고 말해줬어요. 확실히 나는 반자연적 현상이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은 다 그렇고,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사람이 숨 쉬는 것은 열망하기 위해서이고 열망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행동처럼 반자연적 행위다, 미안하지만 자연이라면 진절머리가 나고, 나는 빌어먹을 사랑과 애정과 우정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 나는 통계 일을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고독에는 통계만큼 나쁜 것이 없다. 수십억 단위의 수를 계산하는 데 하루를 보낸 당신은 평가절하되어 0에 가까운 상태로 집에 돌아간다. 그때 찰리 채플린의 슬픈 희극처럼 가난하고 불안에 떠는 숫자 1은 애처로워진다. 나는 1이라는 숫자를 볼 때마다 도망치게 해주고 싶다. 1은 부모가 없어 고아원에서 혼자 자랐고, 뒤에서는 줄곧 0이 쫓아와 따라잡으려 하고 앞에서는 큰 수들의 마피아가 모두 그를 노리고 있다. 1은 난자가 없어 수정이 되지 않는 출생 전 증명서와 같다. 그것은 2가 되는 것을 꿈꾸며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늘 제자리이기 때문에 희극이 된다. 늘 미생물 상태인 것이다. ... 내가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항상 채플린에게 그 작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커다란 0에 쫓기는 1을 연기하게 했을 것이다. 커다란 0은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겁을 주면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1이 2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0은 1이 일억이 되기를 바라며 그보다 적은 수는 바라지 않는다. 인구 통계학적인 수가 되어야 수지가 맞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실 사업이 되어 아무도 정자은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채플린은 항상 도망칠 수밖에 없고 항상 시작도 끝도 없이 다시 혼자 남는 것이다. 나는 채플린이 무엇을 먹는지 궁금하다.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진지한 문제가 된다.


🔖 난 내 자신을 환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우리에게 맞춰주기를 바란다. 나는 가끔 아주 외로운 기분이 들 때 복수형으로 '우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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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역시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캘리포니아에서 트럭 앞유리창에 부딪혀 으깨지는 엄청나게 많은 사랑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랑은 본성 속에 존재한다. 나는 그로칼랭을 인간의 목소리로 말하게 해 환상에 빠지게 하려는 생각도 포기했다. 이제 속임수는 됐다. 나는 가끔 모든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지만 실제 흘러나오는 대사와 잘 맞지 않는 더빙된 영화 속에 사는 기분이 든다. 촬영 후에 녹음하는 것인데 가끔 녹음이 아주 잘되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